동학접주 차치구와 그 후 3代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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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접주 차치구와 그 후 3代 2편
차경석(1880~1936)은 한밤중 사형장에 내팽겨진 아버지(차치구) 시신을 등에 업고 삼십 리 길을 달려 선산에 묻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열네 살. 그도 아버지처럼 체구가 건장했습니다. 너부데데한 얼굴도 호박만큼이나 넙적했습니다. 큰아들이었던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크고 작은 동학농민군 전투에 소년 용사로 빠짐없이 참가했습니다. 전봉준의 마지막 호위도 아버지와 함께했습니다. 차경석의 피도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뜨거웠습니다. 18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그는 300여 명의 살아남은 비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고창 흥덕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예수교를 뜻하는 ‘영학계(英學契)’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처럼 위장하고 호시탐탐 틈을 노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차경석은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1907년 음력 5월 16일. 차경석은 강증산(1871~1909)을 만나 그의 문도가 됐습니다. 증산은 차경석의 집에 한 달 동안이나 머물며 “(총칼이 아니라) 오직 도(道)를 통해서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차경석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차경석은 강증산이 죽자 그의 법통이 자신에게 있음을 내세워 보천교(普天敎)를 만들고 교주가 됐습니다. 그는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조선, 중국,일본을 아우르는 나라가 탄생하는데 내가 그곳의 천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도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일어났습니다. 일본경찰의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차경석은 바람 같았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숨어 다니면서 포교와 함께 조선독립을 주장했습니다.
1921년 9월 24일, 차경석은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신도 수천 명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창교(創敎)와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종교 이름은 ‘보화교(普化敎)’, 나라 이름은 ‘시국(時國)’. 스스로 천자임을 선포하고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유유히 빠져 나갔습니다.
조선 민중들은 열광했습니다. 온갖 얘기들이 부풀려져 신비로움이 더해졌고 교세는 마른 풀에 불붙은 둣 활활 타올랐습니다. 1920년대 당시 ‘남북 2,000여만 명 중 700만 명이 보천교 신도’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조선총독부 집계로도 170만 명이었으니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 었습니다.
차경석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선이 닿는 곳이면 모든 단체에 독립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보천교는 1920년부터 1940년까지(1936년 교주 사후에도 계속) 147번이나 독립자금을 지원해 전체 지원 건수의 54%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민족진영 김좌진 장군(1889~1930)에게도 군자금 일부를 댔고, 공산진영 김철수(1893~1986)에게도 독립자금을 주었습니다.
1925년 평양의 조만식 선생(1883~1950)은 정읍에서 차경석으로부터 군자금 일부를 받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됐습니다. 1922년 차경석은 출판사 보광사를 만들고, 그 이듬해부터는 기관지 ‘普光(보광)’을 펴냈습니다. 최남선이 운영하던 ‘시대일보’도 인수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교주 차경석은 여전히 수배령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소재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차경석을 교주로 삼아 은밀히 국권회복을 도모하되 교도가 5만5,000명에 달하면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비밀음모 단체로서 주모지는 조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도 모집에 분주하되 특히 산간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력이 매우 성대했다.”
-〈동아일보 1921 년 4월 26일자 기사에서〉
차일혁(1920~1958)은 차경석의 아들입니다. 그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을 펼쳤습니다(1938~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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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저작권자(김화성)의 사전 허락에 따라 발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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